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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게 오래 간다'... 이게 바로 인문학

글쓴이 고동환 작성일 2015.05.18 19:36 조회수 1780 추천 1

요즘 들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 경제도 인문학으로 접근하고 기초 학문인 수학조차도 인문학적 접근이 대두되고 있다.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이기에 이런 움직임이 이는 걸까.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인문(人文)'이란 단어를 찾아보았다. '인류의 문화' '인문과 문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인륜의 질서' 등(네이버 사전)이 사전적 의미다.

그렇다며 '인문학(人文學)'은 인간과 그에 관계된 모든 문물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학문일 터다.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과 교양을 아우르며 인류의 문화 전반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이해를 뿌리로 하고 있다. 좀 유식하게 말하면,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위키백과)을 칭한다.

쉽게 말하면, '교양이 곧 인문학'이란 건데 얼마나 교양이 땅에 떨어진 시대가 되었으면 이런 게 붐이 될까 싶다. 신문지상을 뒤덮는 인면수심의 사건들을 접하면 과연 인간이 무엇인지 다시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문학 열풍이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인간이 인간답지 못해 다시 교양을 배워야 하는 현실이 한심하기도 하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지금이라도 이리 인문학의 열풍 속으로 사람들이 머리를 들이민다는 게 희망이 아닐까. 적어도 문제를 알긴 한다는 거니까. 배우면 나아지지 않을까. 너무 과한 희망일 수도 있지만.

목수가 된 인문학자의 3막 18장 인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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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수의 인문학>(임병희 지음 / 비아북 펴냄 / 2015. 4 / 264쪽 / 1만4000원)
ⓒ 비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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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열풍 때문인가. 목수가 인문학을 들고 우리 곁으로 들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인문학자가 목수가 되어 그의 전공인 인문학을 강의한다고 하는 편이 맞다. 그의 이름은 임병희다. 임병희가 쓴 <목수의 인문학>(2015, 비아북 펴냄)이 그 책이다.

저자 임병희는 소개 글에서 "방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길을 찾으려 했다"며 자신의 구도 열정을 자랑한다(?). 그는 시를 쓰고자 문학을 공부했지만 결국 신화를 공부했다. 문화인류학과 무당, 굿판과 친하다. 끊임없는 사고체계의 변환을 시도한 것이 중국 유학으로 그를 이끌었고, 거기서 동북아신화를 연구했다.

당연히 중국고전을 중심으로 한 동양고전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책은 나무와 공방에 관한 이야기들이지만 결국은 중국고전, 사서(四書)와 노장(老莊)을 풀이한 책으로 읽힌다. 딱딱한 고전이 이리 공방에서 제맛을 들어낼 줄 책을 접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문학 전공자답게 맛깔 나는 필체로 사서삼경은 물론 중국의 고전들을 자신의 삶에 농익힌다. 그 삶이 바로 인문학이고, 그 삶이 바로 철학이 되었다. 그래서 인생 3막18장이 된다. 철학이 별 건가. 삶에 의미가 녹아 있으면 철학이다. 저자는 공방에서 그걸 우리에게 삶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순간에 무엇이 되고자 한다. 그게 영악한 오만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저자의 구도적 삶이 그랬듯 그 어느 것도 단박에 이뤄지는 건 없다. '단단히 빨리 자라는 나무는 없다'는 저자가 터득한 진리가 몸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게 당연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초스피드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너무 쉽게 무엇이 된다. 그래서 불행하다. 너무 쉽게 이룬다. 그래서 인생이 쉬운 줄 착각한다. 저자는 '춘재'와 '추재'의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일침을 가한다. 나무가 살아낸 흔적이 나이테이듯, 우리의 삶이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것임을 일깨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지문이 있듯 나무에게는 자신만의 결이 있다. 18밀리 두께를 사이에 두고 나무는 서로 다른 결을 보여준다. 나무의 결은 나무가 건네는 인생 이야기다. (중략) 나무에게 뚜렷한 각인을 남기는 세월은 계절이다. 나이테는 나무가 산 한 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중략)

봄과 여름에 자란 나무의 부분을 춘재라 하고 가을과 겨울에 자란 부분은 추재라 한다. 춘재는 빨리 자란 부분이기에 밀도가 낮고 나이테가 흐리다. 반대로 추재는 밀도가 높고 나이테의 색도 진하다. 더디 자라지만 단단하고, 빨리 자라지만 무른 것이 또 나무다."- (<목수의??은 춘재나 추재가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서로 어울린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를 '서로 다투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한다. <도덕경>에 "높은 곳은 밀어 내리고 낮은 곳은 들어 올리며, 남는 곳은 덜어내고 부족한 곳은 보충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인간의 어울림을 설명한다.

삶의 현장에서 인문학이 실천되기를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저자의 말은 참 솔직하다. 초스피드 시대를 사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저자의 참회와 동일시되면 좋겠다. 그러면 인문학 속에서 딱딱하게 굳은 진리가 아니라 자유를 만끽하는 행복이 우리의 현장에서 맘껏 날갯짓을 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공방에서 나무로 가구를 만들며 일구는 삶의 여정은 우리네 일터에서 일궈야 할 인생살이다. 저자가 쓴 3막18장은 실은 우리가 써야 할 일기다. 문과 경첩을 이야기하면서 <여씨춘추>의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의 경첩은 좀먹지 않는다"는 구절을 인용함은 삶을 그렇게 살아낸 자의 경지일까. 학문이 어찌 삶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을 열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 시작이 경첩이다. 경첩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운동성을 주는 것처럼 문을 연다는 하나의 행위는 더 큰 세계로 나가는 계기가 된다. 열어야 할 것은 눈앞의 문만이 아니다. 생각의 문도 열어야 한다."- (<목수의 인문학> 39쪽)

사람들이 경칩의 끊임없는 움직임에 침잠한 저자의 의도를 못 읽을 리 없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경첩은 거기에 항상 붙어 있어야 한다. 활동성과 아울러 항시성이 존재할 때 인간의 매개적 기능이 사회에 농익을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거스르지 않고 말이다.

어렸을 때 가죽나무 순을 따 밀가루를 덧입혀 튀겨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미처 가죽나무의 특성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책은 가죽나무가 목재로는 쓸 수 없는 나무라는 점을 <장자>를 들어 일깨워준다. 가죽나무는 그 쓸모없음 때문에 살아남는다는 진리와 함께.

쓸모없다고 버려진 나무, 쓸모없다고 버려진 인생? 그럴 수는 없다. '쓸모없는 것이 오래간다'는 무용장존(無用長存)의 진리는 버겁도록 알차게만 살려는 우리네에게 일침을 가한다. 좀은 더 느슨하게 곁을 보며 사는 것도 좋겠다 싶다.

목수의 도구 중에 분도기를 설명하며 분도기의 각도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진리와 함께 길잡이 역할이 그래서 가능하다는 설명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 삶의 방향은 전환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한다. 외에도 책은, 당장이 아니어도 비트는 유용할 때가 있다느니, 직각자의 한결같음 등, 목수의 도구를 통한 인문학적 접근은 참 상큼하다.

저자는 공방과 목수의 일에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터에서 인문학의 교양이 통하도록 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의 말도 있듯, 인생의 디테일을 추구하다 인문을 잃는다면 실패한 삶일 수 있다. 인문을 잃은 이 시대에 인문학이 일터에 농익게 할 의무는 나와 독자들에게 있지 않을까.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0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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