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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말살, 인문학 강좌는 폭발...왜?

글쓴이 고동환 작성일 2016.01.28 20:21 조회수 2033 추천 1

서울시청 안 서울도서관에서 시민들이 찾아와 책을 읽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서울시청 안 서울도서관에서 시민들이 찾아와 책을 읽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지난 5월부터 이어진 연재에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리면서, 해방 70년 우리 독서 문화사를 통해 늘 이어져 온 것들과, 단절돼가고 있는 무언가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책 안 읽는 국민’

 

‘책 안 읽는 국민’론이 늘 반복돼 왔다. 우리는 진짜 책을 안 읽어 왔을까? 그렇다면 왜 책을 안 읽을까?

 

 

시대마다 그 진단의 뉘앙스와 답은 좀 다르다. 실제로 교육불평등이 심각했고 ‘민도가 낮아서 문제’라는 엘리트주의 담론도 횡행하던 1960~70년대는 물론, 고등교육의 대중화가 전개된 1980~90년대에도, 또 ‘스마트 시대’인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책을 안 읽는 것으로 돼 있다. 흥미롭게도 늘 통계상 한국인이 1년에 읽은 책은 평균 1권 정도였다.

 

 

혹 안 읽은 게 아니라 ‘못’ 읽은 것은 아닐까? 절대빈곤에서 탈출했다지만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돼온 팍팍한 생계, 언제나 누구나 전생애에 걸쳐 ‘노오오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빡빡한 생활시간, 입시 위주의 교육과 숨막히는 성과주의와 등수 경쟁. 돌아보면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었던 적이 별로 없고 독서라는 의식적인 활동에 필요한 지적 훈련이나 그를 위해 쓸 시간·공간적·경제적 여유도 늘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할 때 ‘책을 읽어야 한다’는 한편 강박처럼 다가오지만, 다른 한편 전혀 귓등에서만 울리는 ‘남의 일’이 되어왔던 것이다. 사실은 아주 많은 이들이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어느샌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실질 문맹률’이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가 됐다.

 

 

■ ‘책 없는 시대’의 책 읽기

 

21세기 한국의 독서 문화사는 전에 없는 새로운 국면에 처해 있다. 책은 언제나 티브이·라디오·영화 등의 강력한 라이벌들과 함께 20세기를 보내왔지만, 스마트폰보다 강한 라이벌은 없었던 듯하다. 스마트폰은 이제껏 인간들이 발전시켜온 미디어테크놀로지를 손바닥 안에 집약했다. ‘저장·재현·표현·공유’하는 모든 미디어 기능이 그 속에 총구현돼 있다. 그 기계를 통해 오늘의 인간은 모든 활동을 다 해낼 수 있다. 연애·쇼핑·상거래 등등. (‘사이버’ 자가 앞에 붙긴 하지만 처해 있다 하더라도 현대인들은 스마트폰만 쥐여주면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종이책이 없어질 거라는 성급한 예언이 있었다. 종이책은 전혀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껏 한국에서는 전자책(E북)은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나 근래의 상황은 좀 다른 듯하다. 분명, 전자책과 PDF 파일들 그리고 스마트폰은 책과 인쇄매체를 대체해가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전자책 시장 규모는 2008년 1189억 원에서 3444억 원으로 늘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스마트 기기 보급과 그에 따른 전문 플랫폼의 등장이 원인으로 꼽힌다.”(<베타뉴스>, 2015년 11월25일)

 

 

어떤 이들은 ‘손맛’ 때문에 종이책이 패배하는 일이 없으리라 단언한다. 책 넘김의 감각과 종이가 지닌 고유한 물질성을 플라스틱과 액정화면이 대체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리 있다. 종이책은 분명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종이책의 위상은 조금씩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낮아지고 있다. (볼펜과 연필은 붓과 만년필의 ‘손맛’을 얼마나 빨리 대체했던가? 그리고 키보드는 볼펜과 연필을 얼마나 빨리 대체했던가? 그러니 문제는 단지 ‘손맛’만이 아닌 것이다.)

 

 

나도 이젠 전과 비교하기 어렵게 화면으로 논문이나 글을 보는 데 익숙해졌다. HWP나 PDF 파일을 종이로 출력해서 읽는 수고를 더 이상 안 한다. 이제 PDF 리더는 목차와 검색 기능뿐 아니라 줄 긋기, ‘포스트잇’ 붙이기, 주석 달기 기능이 가능하다. 많은 학회들은 이미 PDF로 온라인에서만 학술잡지를 낸다. 종이책 특유의 물질성과 미학은 상대화되고, 또 어떤 독자들은 디지털미디어의 유용성과 장점을 취하는 길로 기꺼이 가며 종이책을 잊어가고 있다. ‘핸드폰 세대’가 종이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책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화면과 종이에 대한 그들의 감각과 경험은 핸드폰과 컴퓨터가 없는 때부터 책을 접해왔던 세대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신문·잡지에 대해서도 아예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 도서정가제 시행 1주년 맞아

 

책을 산다는 것과 읽는다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어떤 괴리가 있었다. 책을 사고 읽지 않는(못 읽는) 경우도 허다하고, 필요한 책도 안 사고 빌려 읽거나 돌려보는 일도 언제나 가능하다. 거기에는 책이라는 물건 자체나 또는 그 속에 담긴 앎과 쾌락에 대한 소유의 감각 같은 것이 작동한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변해왔으며 저작권·출판권의 문제도 그 주변을 회전해왔다. 특히 오늘날의 사람들은 책을 더 잘 사지 않게 됐는데, 책에 담길 정도의 고급한 ‘콘텐츠’를 접하고 취득할 수 있는 방법과 관련된 문화와 유관한 듯하다.(이는 음반을 사지 않는 것과 비견될 만한 일인지 모른다. 오늘날 음악을 듣는 일은 음반을 사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음원’을 구매하여 저장하는 일이다.)

 

 

지난 70년간 우리 독서사·출판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독서시장은 좁았다. 유통 체계나 관행도 늘 불안정하고 문제가 많았다. 그것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노력도 줄기차게 시도됐다. 2014년 가을부터 실시한 도서정가제도 처음은 아니었다. 1970년대에도, 80년대에도 덤핑이나 새로운 ‘가격마케팅’과 도서정가제가 맞섰다. 2014년 11월에 시행된 불완전한 도서정가제는 어떤가? 일시적으로 많은 혼란을 야기했고 ‘작은 출판사’들을 살리겠다는 취지에 맞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책 유통업계는 이익을 보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또 서울 시내 주요 서점뿐 아니라 지역 서점 매출도 15~40% 증가세로 돌아섰다는 보도도 있다.

 

 

이런 부침과 무관하게 서점 문화와 작은 출판사를 살리는 방책을 마련하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도서관이 지역 문화의 거점 역할을 하는 것도 언제나 필요한 일이다. 문화적·경제적 양극화를 극복하지 않고 한국 독자들의 책 구매력을 근본적으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도서관과 서점은 그래서 어떤 ‘공공적’ 보완물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시민인문학과 독서국민운동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독서 대중화운동, 독서국민운동’이 없었던 적도 없다. 시대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독서운동은 늘 한편으로는 보다 보편적인 ‘계몽’ 또는 교양 운동의 함의를 갖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적 근대화나 ‘국민 만들기’와 결부된 것이었다. 요즘도 ‘책 읽는 사회 만들기 운동’이나 ‘대한민국 독서토론·논술대회’ 같은 것이 있지만 이전처럼 눈에 잘 띄지는 않고 의미도 다른 듯하다.

 

 

대신 근래에는 시민인문학이 활발하다. 시민인문학은 200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했는데, 2013년 이후 정부의 문화정책과 조우했다. 정부는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위한 주요 정책으로 ‘인문정신문화’ 창달 사업을 정권 초기부터 실행했다. 교육부의 인문학 관련 정책과 별도로 문화체육관광부는 2014년 ‘4대 전략’ 중에 ‘인문 전통의 재발견’을 제시했고, 사상 최초로 인문학 전담 실무부서도 설치했다. 또 2014년 ‘인문정신문화 진흥사업’에 문화부는 515억8천여 만원을 배정했다. 그래서 2008~2009년쯤부터 서서히 늘던 공공기관의 인문학 강좌가 폭발적으로 신설됐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이 공공기관 인문학 강좌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이런 프로그램은 대체로 무색무취한 ‘교양 강좌’류의 지식 전달 프로그램으로 이뤄져 있고, 일회적인 이벤트로서의 성격을 갖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강좌에서 ‘시민’은 피동화되기 십상이다. 아마 많은 시민들이 이미 경험했을 터이지만, 그런 무료 강좌를 수동적으로 한두 번 듣는 것은, 인문학 본연의 목적과도 무관하거니와 인문학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지도 못할 것이다.

 

물론 일단 인문학 강좌에 찾아가보는 시작은 너무나 중요하다. 스스로 필요한 강좌를 찾아가고 또 스스로 공부하고자 해야만 시민인문학이 우리 삶에 효력을 발할 것이다. 정치적·경제적 양극화가 문화와 삶, 정치의 전영역에서 파국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오늘날, 평생교육과 문화적·사회적 문식성의 문제는 다시 중요하다. 그래서 시민인문학에 대한 인문학자들의 책임도 중하다. 인문학은 필연적으로 책 읽기와 결부되니까 말이다.

 

 

■ 인문학과 사회과학 책 읽기

 

그런 면에서 최근 인문학 서적 열풍은 의미와 동시에 한계도 갖고 있다. 대학 인문학은 말살의 길로 가고 있고 인문학자의 자존감은 최악의 상태이지만, ‘인문학’은 오늘날 한국 독서시장을 선도하는 가운데, 특히 문사철 각 분야의 인문학 지식을 요약하는 대중적인 서적이 연이어 베스트셀러가 돼 있다. 그 가운데에는 (나쁜 의미의) 자기계발의 코드와 접속한 경우도 여럿 있고, 특히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 중에 ‘인문학’으로 볼 수 없는 야릇한 책들도 껴 있어 독자들의 주의가 요망된다. 물론 쉬운 ‘대중’ 인문학 책들도 모두 쉽게 폄하되거나 타기될 수 없지만 대형 서점의 마케팅이나 책 분류를 다 믿으면 안 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30년 독재를 극복한 힘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운동과 시민 스스로에게서 나왔듯이, 오늘날의 저강도 독재·세습자본주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기초체력도 역시 책 읽기와 토론에서 나올 것이라 생각해본다. 우리는 다시 앎과 이성으로써, 저 군림하는 미망(迷妄)과 알량한 기득권에 빠진 세력에 민의 ‘가르침’을 보여주고, 인간이 함께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인)문학 서적 중에서도 ‘현실’을 다룬 것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래 필자가 읽은 것 중에는 데이비드 하비나 토마 피케티 같은 외국 학자의 책 외에도,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 오준호의 <세월호를 기록하다>, 김동춘의 <대한민국은 왜?> 같은 한국책이 의미 깊었다. <끝>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234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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