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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빛 감도는 기왓장에서 4세기 건축물의 문화를 읽다

글쓴이 고동환 작성일 2016.01.29 13:32 조회수 2231 추천 1

▲ 사진1 천상영창_명고구려수막새

 

수막새의 주연부에 제작년도를 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표시된 연도는 건물의 신축시기일 가능성이 높고
고구려 수막새가 제작년도를 표기한 사례가 많은 것은
고구려인들이 작은 사물에도 기록으로 후세에 남기려는
수준 높은 문화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실향민이 고향을 그리워하듯,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고향과도 같은 나라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1300년이 지났지만 후손들은 건재하고 또 다른 세계적인 국가를 이루며 그 脈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韓半島’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半島國民’으로 고정돼 버린 느낌이다.
우리에게 내재된 대륙인의 기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단 한 가지 방법은 紅山文化, 古朝鮮, 高句麗, 渤海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古代史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잃어버린 과거의 領土는 현재로선 어쩔 수 없지만 국가의 領域은 항상 유동적이며 변한다는 진리를 잊지 않고 과거의 역사를 작게나마 느끼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역사를 배우고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존속기간은 700여년, 그러나 지금 고구려의 목조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건물터에 남아있는 주춧돌과 뒹구는 기와조각만이 건물의 규모를 가늠케 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그래서 古代의 기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기와의 무늬와 소성도, 재질 등의 연구로 건축물의 築造年代와 규모를 추정한다. 古代建築을 연구하는 데 필수요소는 ‘고대기와’다.


우리나라에서 기와가 최초로 생산된 시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와집 건축시기와 같다. 삼국시대는 고구려가 최초로 기와를 생산하고 궁궐과 사원, 古墳에 기와를 사용했다. 고구려 國內城의 建物址와 고분에는 아직도 수많은 기와 조각들이 산재하고 있다. 고구려 기와는 대체로 용도에 따라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건축에 사용되는 赤色系列의 기와와 고분에 사용되는 黑灰色系列의 기와다. 실제로 국내성의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서대묘 등의 왕릉급 고구려고분에서 출토되는 수막새와 기와는 모두 흑회색이고 東臺子 제사유적, 丸都山城 왕궁유적, 평양의 궁궐유적 등 생활 건물터에서 출토되는 막새와 기와는 적색계열이 많다(6세기 이후 일부 건물지에서는 흑회색 기와도 출토된다). 특히 고분에서 사용된 흑회색의 수막새기와에는 채색흔적도 보여 지붕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모습을 알 수 있다.

 

▲ 사진5-1 호로고루 고구려산성발굴현장

 

(사진①)과 (사진②)는 고구려 국내성의 환도산성 궁궐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인동무늬 수막새(忍冬文瓦當)와 연꽃무늬 수막새(蓮花文瓦當)이다. 인동무?? 그사이에 간잎을 뾰족하게 표현했다. 막새부분과 수키와의 접합부분은 고구려 특유의 빗질하듯이 홈을 파서 접합이 잘 되도록 했고 점토를 덧대어 꾹꾹 누른 손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사진③). 고구려 특유의 기와 제작기법으로 기와파편을 잘게 부숴 흙반죽에 섞어서 성형한 흔적으로 ‘shard’도 보인다(사진④). 현재 남한에서 출토된 고구려 수막새는 연천 호로고루산성의 연꽃무늬 수막새(사진⑤, ⑤-1)와 아차산성 홍련봉 제1보루의 연꽃무늬 수막새(사진⑥) 뿐인데, 호로고루산성에서 출토된 수막새의 제작방식에 근접한다.

 

 

(사진①), (사진②)의 고구려 수막새가 중요한 이유는 막새의 테두리인 주연부에 새겨진 銘文 때문이다. 현재까지 출토된 고구려의 수막새에 명문이 새겨진 사례가 있지만 모두 瓦範(막새의 문양을 찍어내는 틀)에 새겨서 찍혀 나오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수막새들은 와범으로 무늬를 찍은 후에 胎土가 마르기전에 예리한 도구로 막새의 주연부에 글씨를 새긴 것이며 ‘天祥永昌’(사진⑦~⑩)과 ‘壬午’(사진⑪~⑫)이다. ‘天祥’은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永昌’은 중국 東晋의 年號로 서기322년이며 그 해가 바로 ‘壬午’년이다. 두 수막새의 제작시기가 일치한다.

 

 

이 수막새기와의 제작년도를 고구려 제15대 국왕 美川王(? ~ 331년, 재위 300년~331년)이 요동을 정벌한 2년 뒤인 미천왕 23년(서기322년)으로 비정할 수 있다. 수막새에 새겨진 명문의 書體는 隸書의 필획이 느껴지는 고졸한 楷書體로 당시 유행하던 서체다. 이 수막새는 4세기 초에 이미 붉은색 계통의 고구려 수막새가 생활 건축물에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절대년도를 알려주고 있으며, 이미 국내성의 古墳에서 출토되고 있는 흑회색의 ‘태녕4년명문자수막새’(서기326년)나 ‘무술명문자수막새’(서기338년)(사진⑬)와 제작시기가 겹침으로 용도에 따라서 수막새의 제작문양과 제작기법의 차이를 구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환도산성 궁궐지의 건축년대를 기존학설보다 100년 정도(4세기) 올려볼 수 있게 된다(사진⑭).

 

 

수막새의 서체로 보아 瓦工의 글씨는 아니고 하급관리 이상의 감독관 글씨로 보아야할 것인데, 그가 수막새의 주연부에 제작년도를 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표시된 연도는 건물의 신축시기일 가능성이 높고 고구려 수막새가 제작년도를 표기한 사례가 많은 것은 고구려인들이 작은 사물에도 기록으로 후세에 남기려는 수준 높은 문화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나라 기와의 제작은 대체로 4세기로 알려져 있으나?? 높다. 국내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 서기 2세기에 제작된 銘文이 출토된 바 있으니 기와의 제작도 그 시기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시대는 기와의 제작기술이나 예술성이 가장 높았으며 대체로 時代가 내려올수록 제작수준이 점점 떨어진다. 얼마 전 애석하게도 불에 타버린 남대문을 복원할 때 사용한 기와의 문제점처럼 아무리 신기술로 애를 써도 예전처럼 재현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우리가 등한시 한 사이에 잃어버린 전통의 脈은 찾을 길이 없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출처: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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